오피니언

[미국 아줌마의 수다] 잘못한 결혼은 형벌이다

수도일보 2023. 2. 2. 16:46

이계숙 작가

우리집 강아지 밍키. 별명이 부처님이다. 워낙 착하고 순해서. 질투도 모르고 욕심도 없다. 우리집에 놀러 온 지인의 강아지를 제 눈앞에서 안아주고 쓰다듬어도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밥을 먹고 있는데 다른 강아지가 치고 들어와서 뺏어 먹어도 절대로 화내지 않는다. 가만히 비켜서서 그 강아지가 밥을 다 먹고 물러나기를 기다린다. 바보가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었는데 바보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이를 내보이며 성질을 피울 줄 아는 개였다. 그동안 그 성질을 내보일 계기가 없었을 뿐.

한국에서 유기견을 한 마리 입양했다. 힘든 기억은 잊고 푸른 하늘처럼 희망차게 살라고 ‘블루’로 이름 지은 이 녀석, 얼마나 활발하고 극성맞은지 모른다. 밍키를 이겨먹는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말처럼. 길에서 떠돌며 굶었던 기억 때문인지 식탐도 많다. 먹을 게 보이면 돌격하듯 덤벼든다. 착하고 착한 밍키는 묵묵히 블루에게 다 양보했다.

문제는 블루가 지나치게 활발하다는데 있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밍키를 건드리고 치댄다. 처음엔 밍키가 피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블루가 끊임없이 귀찮게 하자 으르렁대며 사납게 싸우기 시작했다. 일 년 열두 달 가도 헛짖음 한번 없던 밍키가 말이다. 그걸 보고 깨달았다. 순하디 순한 성격도 상대에 따라 독하고 나쁘게 변한다는 것을.

팔순에 가까운 지인이 있다. 그녀는 분노와 울화가 항상 목 끝까지 가득 차 있어 보였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다. 남편 때문이었다. 물과 불같이 안 맞는 남편과 살다 보니 홧병이 났단다. 가슴 가득 불을 안고 산단다. 아닌 게 아니라 둘이 너무너무 안 맞다. 그녀는 급하고 정확하고 재치있고 야무지고 부지런하고 눈치도 빠르다. 반면 남편 되는 사람은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나 몰라라, 태평한 성격에 둔하고 느리고 게으르다. 같은 말을 서너번해야 겨우 알아차릴 정도로 센스도 없고 말투도 어눌하다. 그러니 둘은 하루가 멀다고 싸운다. 급기야는 물건이 던져지고 몸싸움을 할 정도까지 갔단다. 안식처가 되어야 할 집이 매일 전쟁터란다.

최근, 그녀가 이혼을 하겠다고 했다.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면서. 그녀가 절규하듯 말했다. 결혼 후 50년 동안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고.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이제는 혼자 맘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하려면 진즉 하든지 다 늙어서 이혼은 무슨 이혼이냐고 말리려던 나는 50년 동안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는 데에 할 말을 잊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한 번뿐인 우리의 인생, 맞지 않는 배우자와 사는 것만큼 더 큰 형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와 형제자매는 길어야 이,삼십 년이지만 배우자는 평생을 같이해야 한다. 평생 같이하는 사람이 나랑 성격 및 취향, 가치관이 안 맞으면 삶 자체가 불행이요, 하루하루가 지옥일 것이다. 내 주위에는 그런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이 참 많다. 사랑해서가 아닌, 썩 마음에 드는 사람도 아닌, 꿈꾸던 이상형과는 반대의 사람이지만 상황과 조건과 관습에 떠밀려 한 결혼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나 역시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아이 낳고 그럭저럭 수십 년의 세월을 같이 했었던 부부들. 이제 아이들은 크고 경제적, 시간적 여유는 생겼지만, 배우자와 한집에서 사는 일이 썩 행복하지가 않다. 행복은 고사하고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배우자의 외모며 성격,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다 싫다. 예전에는 그냥 보아 넘기던 것들이 눈에 거슬린다. 그렇지만 싸우는 것도 지쳤고 차라리 관심을 접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게 된다. 급기야는 각방을 쓰기 시작한다. 무우 자르듯 헤어지기에는 같이 해 온 세월의 무게가 너무 무거우니까.

각방을 쓰는 한 여성은 남편 방 앞을 지나치는 것 조차도 싫어서 일부러 빙 둘러 다닌단다. 얼마나 진저리가 쳐지게 정이 떨어졌으면, 얼마나 끔찍하게 미우면 그럴까.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했을까.

누군들 밉지 않았겠나. 누군들 결혼이란 제도가 멍에처럼 느껴지지 않았겠나. 그러나 그런 감정은 순간적이고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남편이 불쌍하고 안타깝다. 나보다 좋은 여자를 만났으면 더 잘 살 사람이 아닐까,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더 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