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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Pic] ‘멱살잡이’ 참아내는 정부

수도일보 2023. 4. 18. 09:59

임성민 국장

최근 미국이 한국을 포함한 우방국들을 지속적이고도 광범위하게 도청했다는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외교가는 물론 정치권에 논란이 일고 있다.

우리가 이번 논란에서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은 치열한 외교 정보전 특성상 적성국뿐만 아니라 우방국 정보 수집 역시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우방국을 도청했다고 거품 물고 달려들 것이 아닌 것이 우리도 미국을 도청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세상 모든 나라는 서로 몰래 상대의 비밀을 알고 싶어한다. 정보 전문가들과 국가안보 전문가들은 “모든 국가는 정치 지도자에게 결정 우위를 제공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한다”고 말한다. 너도나도 하는 일이라 화들짝 놀라거나 ‘잘 걸렸다’며 소매를 걷어붙일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왜 발생했느냐?’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그럼 어떻게 할거냐?’를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에 이번 논란의 무게 중심을 어느 곳으로 가져가야 할지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국민들이 다소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우리 정부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결국은 국민들이 바라보는 정부의 반응과 정상적인 주권국가의 대응에 현저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로서는 모든 논란들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국면인 셈이다.

바로 옆집에 살면서 엄청 가까운 사이인 철수네와 영희네 아빠가 중요한 의논을 할 일이 있어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영희네 엄마가 철수네 집 안방 벽을 몰래 뜯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엿들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철수네 아이들이 장난감을 누구네 줄까 말까를 놓고 대화한 내용까지 알려졌다는 이야기가 철수네 아빠 귀에 들어왔다면, 과연 철수네 아빠가 영희네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상식의 영역이다.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 소매 걷어붙이고 철수네로 쳐들어가 따지고 멱살잡이를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청 논란이 미국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해당 도감청 실제 내용까지 알려진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취한 조치는 달리 없었다. 한 여권 관계자는 미국이 독일을 감청했을 때 독일이 노발대발했지만 그로부터 4년 후 독일이 미국을 감청한 사실이 드러나 매우 민망한 상황에 처한 역사가 있다는 말로 대미 외교 현장에서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실은 폭로된 외교문서들 상당수가 조작된 것이라는 ‘메신저 공격’ 전략까지 사용한다. 게다가 미 백악관 대변인이 도청 사실을 시인하고 ‘중엄한 사건’이라는 정치적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외교라인은 ‘(도청한 것에)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취지로 얼버무렸다.

대통령실의 소극적 대응과 대미 저자세 상황은 언론과 야당이 만들어낸 프레임이라고 치부해야 하는 것일까? 미국 측의 '도청' 정황과 관련해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하겠다는 말이 현재의 상황에 맞는 말일까? 이번 사안이 뭔가 협의를 할 사안일까?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면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요구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비공식적으로는 앞으로 이어질 외교전 테이블에서 필요한 카드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비열한 것일까? 정상적인 주권국가의 정부라면 도청 사실이 알려진 즉시 한국에 주재하는 미국 CIA 책임자를 즉각 추방했어야 했다. 이 정도 제스쳐는 해줘야 국민들의 자존감에 구멍을 낼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얼마전에는 일본에 엄청 퍼주고도 독도가 지들 땅이라고 우기는 꼴을 국민들이 면전에서 보게 하더니, 이젠 미국이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를 불법으로 엿들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미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 일정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속이 터져도 너무 터지는 일이다.

물론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나라와 미국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다투도록 만들 목적으로 주변국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에 모조리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엔 좀 그러니 다음에 만나자”라는 말 한마디 정도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모습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야당과 정치권의 진실규명 요구를 한미동맹을 훼손하는 악행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한미동맹은 우리나라 국익을 위한 여러 가지 중 단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절대가치를 지닌 목표가 아니다. 수단이 훼손될까봐 절대적 목표인 주권과 국익, 국민 감정을 훼손해서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