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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Pic] ‘내 아이’와 ‘우리 아이’

수도일보 2023. 3. 22. 16:32

임성민 국장

# 초등학교 4학년 수학 시간,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적어 놓고 “OO가 한 번 풀어볼까?”라며 한 아이를 지목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 문제를 풀지 못했고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후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부모는 해당 선생님을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했다. 아이에게 정서적 수치심을 줬다는 것이 원고 측의 주장이었다.

# 초등학교 5학년 국어 수업시간. 한 학생이 고의적으로 휴대폰을 사용하며 수업참여를 하지 않았고, 이를 한동안 참던 선생님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수업시간에 휴대폰을 하면 안되지'라고 했다. 해당 선생님은 그 일로 학부모로부터 항의를 받고 이리저리 해명하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반 전체 학생들이 있는 곳에서 내 아이를 특정해서 수치심을 주었다는 주장이었다.

# 어린이집 교사로 재직하던 선생님이 아이가 밥을 먹다 입 주변에 묻힌 밥풀들을 떼서 버리지 않고 숟가락을 이용하여 모아 다시 먹인 사실 등을 들어 정서적 학대라고 주장하며 경찰에 신고했다. 아이의 엄마는 선생님이 살고 있는 집 주소까지 알리며 "아동학대범이어서 출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최근 아동학대로 고소당하면서 교사직을 잃은 것은 물론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유명 탐사프로그램을 통해 조명되면서 시청자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선생님들의 생활지도나 교습방식 자체에 아동학대로 오인될 만한 행위들이 도사리고 있어서 소위 ‘운이 나쁘면’ 고소를 당하는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학부모의 민원이 형사사건이 되지 않도록 학교나 교육청 내에 중재 시스템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하고 현행 아동보호법 하에서 ‘아동학대’의 기준이 모호한 것이 이유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서적 학대의 경우, '아동의 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행동'을 정서적 학대로 의율하고 있다 보니 그 모호성이 문제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무엇보다 아동학대의 경우 즉각적인 조치가 필수이고, 아동학대로 신고가 될 경우 교장, 원장 등 장의 입장에서는 곧바로 선생님의 출근을 금지하여 아동과의 접촉을 금해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안타까운 반목이 우리 사회에서 왜 발생하는 것일까?

필자는 우리 사회가 이 ‘우리’라는 대명사를 점차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우리 아빠, 우리 엄마, 우리 아들, 우리 딸, 우리 선생님 등 ‘우리’라는 대명사를 주로 사용해 왔다. 그래서 이러한 공동체 문화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외국인들 역시 한국의 고유한 공동체 문화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우리’라는 대명사 대신 ‘내’라는 대명사를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자녀가 일부 부모들에게 일종의 소유로 여겨지는 풍토가 확산되고, 여기에다 나는 조금도 손해 보지 않겠다는 철통같은 개인주의가 팽배하면서 ‘내 아이’ ‘내 아들’ ‘내 딸’ ‘내 것’처럼 극단적인 갈라섬이 생겨났다. 예전에 우리는 ‘우리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우리 선생님’이 잘 돌봐 주실 거라 믿었고 그 ‘우리 선생님’에게 ‘우리 아이’도 다른 집 아이도 모두 같은 ‘우리 제자’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문제를 풀지 못해 속상했을 내 아이의 울먹거림이 가슴 아플 수 있다. 친구들 앞에서 잘못을 지적받아야 했던 내 아이의 창피했던 마음이 안쓰러울 수도 있다. 입에 묻은 밥풀을 다시 떠서 입에 넣은 것이 불쾌하고 비위생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부모의 마음이 깡그리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내 아이’가 선생님에게도 동일하게 ‘우리 아이’였을 거라고 믿는 믿음, 그래서 선생님 역시 속상했을 거라고 믿는 믿음, ‘내 아이’의 행동으로 인해 ‘우리 선생님’은 혹시 마음 아프지는 않았을지 걱정하는 마음, 이것이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교권의 침해인지 아동에 대한 학대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매스컴을 통해 나올 때마다 ‘우리’라는 대명사를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