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숙 작가
샌프란시스코 중앙일보의 연재물 중 ‘무 대리 용하다 용해'라는 만화가 있었다. 번뜩이는 재치와 촌철살인의 유머가 내 배꼽을 잡게해서 나는 이 만화를 무척 좋아했었다. 만화의 무대는 직장이다. 주인공 무 대리를 비롯, 상사인 마 부장과 직장동료 몇 명이 주요 등장인물이며 필요에 따라서 부인과 아이들도 나온다. 만화는 이들 열댓명이 매일 지지고 볶고 싸우고 울고 푸념하고 다시 화해하는 이야기를 골자로 하고 있다.
무 대리가 다니는 회사는 흡사 전쟁터같다. 서류와 볼펜이 날으는 건 예사이고 주먹이 왔다갔다 할 때도 있고 난무하는 욕설은 아예 회사생활의 일부분이다. 그 중 마 부장으로부터 제일 많이 당하는 건 우리의 불쌍한 무 대리. 나약하고 소심한 그는 가끔 마 부장을 곯려주기는 할지언정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못한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해보지 않은 나는 만화를 보면서 실제 한국의 회사는 어떤 분위기일까 궁금했다. 무 대리 말고도 직장을 주무대로 한 한국만화는 거의 부하를 죽일 듯이 갈구고 상사에겐 꼼짝 못하는 내용들이 많다. 만화이니만큰 많은 과장과 허구가 첨부되었으리라 짐작은 해보지만 상사의 괴롭힘과 동료들의 따돌림에 목숨을 끊는 직원들의 뉴스가 심심찮게 들리는 것보면 완전히 허구는 아닌 것 같다.
무 대리 회사에 비하면 미국 회사는 하늘과 땅이다. 상사가 부하직원의 실수나 잘못에 큰소리로 야단을 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업무지만 처음엔 내 둔한 머리에, 짧은 영어에 많이 헷갈렸었다. 그렇지만 그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상사에게 불려가 주의를 들은 적이 없다. 그냥 시정을 요하는 이메일이 대부분이었다. 아, 한 번 있다. 입사한지 얼마 후였었는데 첨에 나는 칭찬을 들으러 불려간 줄 알았다. 좋은 말로 먼저 시작을 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출근 시간도 정확하고, 항상 명랑하며,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우수직원이다. 그러나(but)!..."
미국사람들의 말은 but 다음에 나오는 말을 조심하라더니 그게 맞았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커서 주위사람들이 집중이 안 된다고 하니 가급적이면 근무시간에 잡담을 하지 말라는 주의였다. 그런데 전혀 기분이 나쁘지않았다. 상사의 말투가 너무도 정중하고 친절했기 때문이다. 직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주의를 주는 상사라니. 미국회사는 참 인간적이라고 크게 감격까지 했다. 무 대리가 다니는 회사와 비교까지 하면서. 무 대리는 걸핏하면 상사로부터 인격모독에 가까운 비난을 당하지 않나. 나는 무 대리를 동정했다. 그렇게 당하고서도 아침이면 다시 꼬박꼬박 회사에 출근하는 무 대리에게 연민의 정까지 느꼈다.
그러나 내가 감격까지 해가며 인간적이라고 믿었던 미국직장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멀쩡히 일 잘하던 직원이 하루아침에 해고 당하는 것을 몇 번 목격하고서였다. 내 옆 직원은 점심먹고 돌아와 책상에 앉는 순간 해고당했다. 인사과 직원과 보안팀이 오더니 다짜고짜 그의 짐을 박스에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를 호위해 출입문 밖으로 발로 차듯이 내 보내버리는 것이었다. 죄인처럼 앞뒤로 호위당해 걸어 나가던 그의 얼굴은 분노와 당혹감과 창피함으로 붉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후들후들 떨려서 한동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사람을 저런 식으로 해고할 수 있을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라도 적어도 저런 식으로 사람을 쫒아내는 것은 너무나 비인간적인 처사같았다. 재택근무를 하는 요즘은 다른 방식이다. 컴퓨터에 접근을 못하게 하는 방식. 로긴이 안 되면 해고된것이다.
미국회사는 얼음같이 냉혹하고 냉정한 집단이었다. 아무리 오래 근속한 우수직원이라 해도 해고할 때는 칼로 무 자르듯 했다. 그에 비하면 비록 매일 지지고 볶고 좌충우돌 하지만 무 대리 회사는 얼마나 따듯하고 정다운 곳인가. 무 대리 회사라면 직원이 큰 잘못을 저질렀을 망정 우리 회사처럼 근무시간에, 많은 동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보안팀으로 하여금 앞뒤로 포위하듯 해서 쫒아내지는 않을 것이다.
콘텐츠 제국 ‘디즈니’사가 이달 초, 직원 7천명 정리 해고를 포함해 7조 원에 육박하는 구조조정 작업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작년에 인텔, 아마존 등 초대형 회사들이 줄줄이 감원을 한 데 이어 각 사업체도 뒤를 따르고 있다. 하루아침에 생업을 잃은 사람들은 어찌 하나. 감원의 삭풍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마음이 춥다. 봄이 멀지 않은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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