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미국 아줌마의 수다] 이제 진정이 좀 되네

수도일보 2023. 2. 9. 16:36

이계숙 작가

결혼한 이후부터 매년 남편으로부터 생일선물을 받는 한국의 친구가 있다. 참 대단한 남편을 둔 친구다. 올해 생일에는 천만원 가까운 샤넬 백을 받았단다. 어떻게 생긴 건지 구경하고 싶다고 했더니 사진을 보냈다. 밤색 같기도 하고 짙은 보라 같기도 한 오묘한 색깔의 크로스백. 친구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참 이상도 하지. 친구의 샤넬 백이 근사하다는 생각은 했으나 갖고 싶은 마음은 안 든다. 그 어떤 값지고 멋진 물건도 그냥 돌덩이를 보듯 무덤덤하고 심드렁하다. 작년에 세상 떠난 시어머니 물건 중에는 비싼 보석들이 좀 있었는데 모두 외며느리인 내 차지였다.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내 취향과 맞지 않기도 했지만 욕심이 전혀 안 났다. 헐값에 다 팔아치웠다.

자존감이 낮은지 열등감이 많은지 늘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오해해서는 걸핏하면 삐치는 지인이 있다. 이 지인이 또 삐쳤다. 나는 삐친 줄도 몰랐는데 옆에서 누가 귀띔해 주어서 알았다. 전후 사정을 살펴보니 피식, 웃음이 날 만큼 사소한 일이었는데 그녀는 이번에도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는 노여워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몇 날 며칠 잠을 설쳤을 거다. 부주의하게 내가 왜 그랬을까. 상대는 또 왜 그렇게 반응할까 분석하느라. 그리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을 봐야 속이 시원했다. 내 쪽에서 먼저 사과하든 변명하든 해명을 해서. 내 잘못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누가 마음을 다쳤다는 게 견딜 수 없이 괴로운 일이었으니까. 지금은 아니다. 삐쳐있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는다. 스스로 풀어지면 다행이고 아니어도 할 수 없고. 이쪽에서 노력해야만 지탱되는 관계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런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거다. 둘이 괴롭느니 혼자 외로운 게 낫다 싶은 거다.

세탁소 두 개를 운영하는 할배가 있다. 요즘 모든 업종이 다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지만 세탁소는 특히 더한 것 같다. 일단 나부터도 재택근무를 하니까 세탁소를 멀리하게 되었다. 옷을 드라이클리닝 할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니 할배의 세탁소 운영이 얼마나 어렵겠나. 인건비랑 렌트비 등을 합쳐 고정 지출만 한 달에 삼만 불이라는데 팔아버리려 해도 인수자가 없고 손을 털려 해도 리스 기간이 앞으로도 5년 가까이 남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한다.

오랜만에 그 할배를 만났는데 얼굴에 여유가 넘친다. 복권이라도 당첨된 사람 같네요 했더니 할배가 하하 웃는다. 그리고 말한다.

“예전 같으면 살이 십 파운드는 더 빠졌을 거다.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 나갈까, 고심하느라고 말이지.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것이 다 부질없고 헛되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내일 갑자기 이슬처럼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는데 무엇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가 싶은 생각. 모든 면에서 아쉬울 게 없는데도 더 가져보려고, 더 올라가 보려고, 더 빛나보려고, 더 빨라 보려고 밤낮으로 아등바등했었지. 이제는 다 내려놓기로 했다. 물결에 흔들리는 배처럼 올라가면 올라가는 대로. 내려가면 내려가는 대로. 엎어지고 뒤집히면 엎어지고 뒤집히는 대로...”

나도 깨닫고 있었다. 우리가 쟁취해 누리려고 목숨을 걸던 세상만사가 늙음 앞에서는, 죽음 앞에서는 안개같이 허무하다는 것.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 우리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쓸데없는 인간관계에 허비하고 쓰레기로 전락하는 물건들에 집착하다가 마친다는 것. 걱정 분노 기쁨 슬픔 미움 등 우리 인간사를 지배하는 감정들이 지나놓고 보면 먼지같이 사사로운 것인데 여기에 얽매어 삶의 본질을 잃고 있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까 미치게 싫은 것도 없고 펄쩍 뛰도록 좋은 것도 없고 주먹 쥐게 노여운 것도 없고 간절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가슴 뛰게 갖고 싶은 물건도 없어졌다. 희노애락에 둔감해진다고(초연해진다고 하면 건방진 말이 될 테니)할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물욕이 없어지니 마음이 편해지면서 평생을 시달리던 불면증에서 해방되었다. 요즘은 얼마나 잠을 잘 자는지 모른다.

웬만한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 나이가 마흔이라고 하던데 나의 마흔은 아니었다. 질풍노도였더랬다. 미친년이 뛰는 널보다 더 어수선하고 더 혼란스럽고 더 어지럽고 더 요란스러웠으니까. 쉰이 되어서도 물론 마찬가지였고. 이제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다. 나이 예순을 앞두고 이제 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