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미국 아줌마의 '수다'] 그늘 아래의 의자

수도일보 2023. 6. 16. 17:04

이계숙 작가

오며가며 인사 정도만 나누던 한 남자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형식적이고 으레적인 대화만 오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깊은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대체 저를 어떻게 믿고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다 하십니까, 내가 놀라서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훌륭한 인품과 높은 덕망으로 한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정 회장님(한때 한인회장을 역임한 할배인데 아직도 한인들에게는 회장님으로 통하는)이계숙 씨가30년 가까이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면서요? 정 회장님과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좋은 관계를 이어올 정도면 이계숙 씨를 충분히 믿을 만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린다. 한 할배다. 어젯밤 아내와 육탄전에 가까울 정도로 대판 싸웠다고 한다. 한숨도 못자고 아침이 되어 일터에 나왔다는 할배. 화가 풀리지 않아서 내게 하소연 할 요량으로 전화를 했단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하소연할 사람은 할배가 아니고 바로 그 부인이다. 할배가 전적으로 모두 잘못한 것이다.

화가 나서 펄펄 뛰는 사람에게 당신이 더 잘못했소, 그럴 수는 없는 일. 잠자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거의 20여분을 혼자 떠들던 할배가 말한다. 열이 뻗쳐서 딱 죽을 맛이더니 다 털어놓고나니 속이 좀 시원하네. 할배가 전화를 끊으면서 말한다. 내 얘기 다른 사람에게 절대 안 하는 거 알지? 내가 응수했다. 걱정 마셔. 내일 한인회관 벽에다 방()을 써 붙일 테니.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남녀가 있다. 처음 만나서는 죽고 못살았는데 몇 년 연애를 하다보니 서로의 결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걸핏하면 헤어지네, 마네 지지고 볶고 싸운다. 싸운 후 둘은 번갈아가며 내게 전화를 한다. 상대방의 잘못과 실책을 비난하고 헐뜯는다. 나는 그저 묵묵히 그들의 하소연을 듣는다. 그러다가 그들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가 좋아져서 희희낙락한다. 그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말한다. 내게 고해바친 상대의 흉과 욕들을 그대로 전해주게 되면 너희는 두 번 다시는 안 볼 철천지 원수가 될 걸?

참 이상도 하지. 도대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믿고 자신들의 사생활을, 남들이 알아서는 안될 비밀 얘기들을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까.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없는 독자들이야 서로 모르니까 숨김없이 자기 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다쳐도 같은 동네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보는 사이인데 말이다.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산전수전 다 겪어서 눈치도 빠르고 남의 심리를 파악하고 분석하는데 도사인 한 지인이 내게 남의 무장한 마음을 해제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정의 내렸다. 아무리 근엄하고 완고한 사람도 내 앞에 서면, 나의 쾌활하고 화통한 웃음소리 앞에서는 안심하고 마음을 연다는 얘기다. 또한 그 지인이 말하기를 내가 무척 수다스럽고 입이 싼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인 편이란다. 그러니까 해서는 안될 얘기는 절대로 안 한다는 것이다. 그건 지인 말이 맞다. 남에게 전하지 말라고 부탁 받은 말은 절대로 안 한다. 전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면 허벅지를 바늘로 찌를지언정 끝까지 비밀을 지켜준다.

또 하나는 내가 남의 얘기를 참 잘 들어준다는 거라고 지인이 분석했다. 보통 본인과 상관없는 얘기는 10분 이상 넘어가면 흥미를 잃기 마련인데, 그래서 슬슬 딴 짓을 하기 시작하고 하품을 하게 마련인데 나는 끝까지 고개를 끄덕여가며 맞장구를 쳐가며 경청해 준다는 것이다. 설사 그게 몸이 비비꼬일 만큼 재미없는 이야기라도 나는 상대방이 얘기를 마칠 때까지 지루하다는 표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인에 의하면 위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내게 마음을 터놓고 속얘기를 한다는 것이다.

지인의 말이 다 맞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명의 전화같은 상담소에서 상담자들의 고민을 분석해 발표한 결과에 외로움이 늘 우선 순위를 차지한 걸 보고 마음이 아팠던 것은 사실이다. 고해(苦海),그 자체인 삶에서 맘놓고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다는 것만큼, 깊은 속내를 털어놓을 대상이 없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나는 내 주위사람들의 의자가 되고 싶다. 이민생활에서 오는 고민과 울분을 맘놓고 털어놓을 수 있고 지친 영혼을 잠시라도 위로 받고 쉬었다 갈 수 있는 큰 나무 그늘 아래의 의자.




저작권자 @수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수도일보 www.sudoilbo.news